1836년 10월 2일 비글호가 콘월주의 팰머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윈은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스승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우가 1835년 그의 학생이었던 다윈의 편지를 모아 다윈의 지리학 편지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배포했기 때문이다. 다윈은 스러우스베리에 있는 고향 집을 방문해 친척들을 만났고, 이후 식물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 박물학자로 비글호에 소개를 해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캠브릿지로 서둘러 갔다. 헨슬로 교수와 함께 자신이 가져온 수많은 표본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윈의 항해 기록도 정리하여 1839년에 로 출판했다. 다윈의 부친은 투자를 종용하여 그의 아들을 자선 모금을 할 수 있는 과학자로 만들었다. 흥분한 다윈은 그가 수집한 표본과 수집품을 설명해줄 과학자들을 초청하기 위해 런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동물학자들은 저장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창고에 넣어둔 표본은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10월 29일 찰스 라이엘은 그를 열렬히 맞았고, 왕립 외과 대학에서 다윈이 수집한 화석 뼈 표본을 분석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는 유망한 해부학자, 리처드 오웬을 소개해 주었다. 오웬은 다윈이 수집한 메가테리움과 같은 거대 멸종 육상 동물들의 거의 완벽한 두개골 등을 보고 놀랐다. 이러한 멸종 동물들은 남미의 현존하는 개체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다윈은 남미 대륙이 조금식 융기한다는 최초의 논문을 썼고 라이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37년 1월 4일 런던지질학회에 회람되었다. 같은 날, 그는 동물학회에 그의 포유류와 조류의 표본에 대해 발표를 했다. 조류학자 존 굴드는 곧 다윈이 검은 새 그로스-비크와 핀치의 혼합 종이라고 생각했던 갈라파고스 새가 사실은 핀치의 12개의 분리된 종이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2월 17일 다윈은 지질학회 평의회로 선출되었으며, 라이엘 의장은 다윈의 화석에 대한 오웬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했으며, 종의 지리적 연속성은 그의 동일과정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월 초 다윈은 라이엘의 과학 학회에 가입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하느님을 법의 프로그래머로 묘사한 찰스 바비지와 같은 전문가와 회합했다. 새로운 종의 “미스터리 중 미스터리”에 대한 존 허셜의 편지는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서 찾은 설명과 함께 널리 토론이 되었다. 다윈은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형 해라즈머스 다윈과 함께 휘그당의 일원으로 머물렀다. 또한 인구과밀과 가난으로 복지가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논쟁적인 휘그당의 〈신빈민법〉(Poor Law reforms)의 근원이 되는 맬더스의 주장을 선동했던 절친한 작가 해리엇 마티노도 그의 신념의 동반자였다. 유니테리언으로서 그녀는 종의 변이를 뜻하는 급진적인 결론을 반겼다. 당시 이러한 설은 그랜트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의 영향을 받은 외과 의사들이 신봉하던 것들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방어적인 성공회 사회 질서의 아나테마(anathema 저주)였던 것이다. 굴드는 다윈을 만나서 각각 다른 섬에서 채집한 갈라파고스 제도의 흉내지빠귀가 변종이 아니라, 분리된 종이라고 말을 해준다. 그리고 다윈이 굴뚝새라고 생각했던 것도 또한 핀치류라고 알려줬다. 다윈은 섬마다 구별하여 핀치에 분류표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글호에 탑승한 로버트 피츠로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노트에서 자료를 찾아 섬마다 종을 분리했다. 그 두 마리 레아는 또한 다른 종이었고, 3월 14일 다윈은 그들의 분포가 남쪽으로 가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발표했다. 3월 중순경 다윈은 레아나 거대한 과나코를 닮은 이상한 마크라우케니아와 같이 멸종했거나, 살아 있는 종의 지리적 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하는 가능성”에 대해 적색 노트에서 고민 중이었다. 수명에 관한 그의 생각, 즉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에 대한 그의 생각을 노트 B에 7월 중순 경 적게 되었다. 1838년 지질학회 서기에 선출되고 지리학자로도 활동하며 동물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건강이 나빠지자 1842년에는 런던 교외에 은거하면서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839년 1월 훌륭한 조수이자 외사촌인 엠머 웨지우드와 결혼 후, 탐구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학문 활동을 했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엠마의 집안과 다윈의 집안 모두 부유했기 때문에, 다윈은 학자로서의 연구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842년 생물계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 〈산호초의 분포와 구조〉를 발표했으며, 1842년 6월,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 이론에 대한 35쪽짜리 초고를 연필로 썼다. 같은 해에 종의 발생에 관해 착상했다. 1844년 〈화산도의 지질학적 관찰〉을 출판했고, 1846년 비글호 탐험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미의 지질학적 관찰〉을 발표했다. 이러한 활발한 학문 활동은 다윈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닌, 독일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한 부인 엠머의 번역 봉사를 받아서 이룬 것이기도 하다. 1856년 진화론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되기 전에 앨프리드 월리스로부터 자기의 학설과 똑같은 취지의 논문이 온 것을 보고 놀랐으나, 친구인 후커와 라이엘의 배려로 1858년에 린네 학회 총회에서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발표하였다. 1859년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생물 진화의 사실을 제시하고, '자연선택'을 수립하였다. 그에 의하면 어떤 형태의 생물이 오랜 세월 동안 환경에 맞추어서 서서히 모습을 변화해간다는 것이었다. 그의 발언 중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부분은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기독교가 그때까지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이었고 다윈의 견해들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860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는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냐 아니냐를 놓고 영국 사회 각계 인사들이 모여 논쟁을 벌였다. 이 토론회에 다윈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찰스 라이엘, 앨프리드 월리스, 토머스 헉슬리 등이 나왔고, 기독교 측으로는 영국 성공회 주교인 윌버포스가 나왔다. 논쟁은 생중계되었고, 논쟁 후반에 윌버포스가 진화론 지지 진영을 향해 그대의 할아버지 쪽 선조가 원숭이냐, 할머니 쪽 선조가 원숭이냐 라는 질문을 던졌고, 헉슬리는 부도덕한 인간을 할아버지라 하느니 정직한 원숭이를 할아버지라 하겠다고 응수하여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후 진화론의 찬반을 놓고 격렬한 논쟁의 장이 되었다. 그의 발표는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학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 후 약 10년 동안 확고한 기반을 닦게 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차츰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동물학·식물학 및 인류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 와 사람의 진화에 대해 다루는 (1871) 등이 있다. 다윈은 흔히 진화론의 이론을 정리한 생물학자로만 알려져서 당시 일부 보수 언론들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는 풍자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 당시 백인들의 흑인 노예 제도에 격분하여, 노예 제도를 반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남아메리카 여행 당시 비글호 선장과 노예제도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선장이 노예들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다윈은 이에 대해서 만약 주인이 없는 곳에서도 그런 말을 하겠느냐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백인 주인들이 노예들을 고문하는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한편 그의 종의 기원 발표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한' 문제의 발언이 나오기 직전인 1856년 독일의 라인란트 주 뒤셀도르프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논쟁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다윈이 죽기 전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으며, 다윈이 친구에게 히브리 성서의 창조설을 진리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존재하나 이는 거짓이다. 다윈은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라는 말을 남기고 882년 4월 19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성공회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2022.09.07 - [심리학] - Ⅲ. 찰스 다윈_고대 동물 화석의 발견과 원주민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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